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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를 이기겠다고 시작한 브랜드가, 10년이 지나도 유니클로의 대안이 되지 못하는 이유

스파오 매장에 가면 많은 옷들을 보게 됩니다. 콜라보 티셔츠가 쌓여 있고, 가격표를 보면 솔직히 나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랜드그룹의 스파오는 2023년 기준 연매출 6천억 원을 넘어섰다고 알려져 있어요. 국내 SPA 브랜드 중에서는 독보적인 숫자입니다. "드디어 한국형 유니클로가 나왔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죠.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스파오 하면 뭐가 떠올라?"라고 물어보세요. 아마 열 명 중 여덟 명은 "싼 옷", "콜라보 티셔츠", 혹은 "이랜드 거 아니야?" 정도로 답할 겁니다. 같은 질문을 유니클로에 던지면 어떨까요. "히트텍", "에어리즘", "깔끔한 기본템", "라이프웨어" 같은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매출 규모로만 보면 스파오도 대단한 브랜드입니다. 그런데 소비자의 머릿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전혀 다른 크기예요.
이 차이가 왜 생기는 걸까요. 단순히 "글로벌 기업이니까", "자본력이 다르니까"로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합니다. 자라(ZARA)가 한국에서 철수한 뒤에도 소비자들은 자라 스타일을 기억하거든요. 반면 스파오는 바로 옆에 매장이 있는데도, 떠올리기 전에 들어가지 않는 브랜드가 되어버렸습니다. 매출 6천억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브랜드 성장"과 "매출 성장"의 간극입니다.
매출이 브랜드를 만들어주지 않는 이유
흔히 "매출이 올라가면 브랜드도 커지는 거 아닌가요?"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건 착각이에요. 매출은 "얼마나 많이 팔렸는가"의 지표이고, 브랜드는 "소비자가 나를 어떤 존재로 기억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둘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벌어지기도 합니다.
케빈 레인 켈러(Kevin Lane Keller) 교수의 "고객 기반 브랜드 자산(Customer-Based Brand Equity)" 모델이 이걸 잘 설명해줍니다[1]. 켈러 교수에 따르면, 브랜드 자산은 네 단계로 쌓입니다. 먼저 소비자가 브랜드를 인지하고, 그 브랜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브랜드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가 형성되고, 마지막으로 "관계"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중요한 건 첫 번째 단계인 인지조차 단순한 이름 알기가 아니라 "이 브랜드는 이런 브랜드야"라는 명확한 연상이 함께 따라와야 한다는 겁니다.
유니클로를 예로 들어볼게요. "라이프웨어(LifeWear)"라는 컨셉 하나로 모든 것을 관통합니다. 히트텍이 나오든, 감사제 할인을 하든, 르메르와 콜라보를 하든, 전부 "일상의 옷을 과학적으로 완성한다"라는 한 문장 아래에 있어요. 소비자는 유니클로 매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자기가 무엇을 살지 알고 있습니다. 기본 니트, 기능성 이너웨어, 깔끔한 바지. 이게 바로 "브랜드 컨셉이 구매 맥락을 만들어주는" 상태입니다.
스파오는 어떤가요. 콜라보 캐릭터 티셔츠로 화제가 되었다가, 다음 시즌에는 베이직 라인을 강조하고, 또 어느 해에는 스포츠 라인을 내놓습니다. 각각의 상품은 나쁘지 않아요. 가격 대비 품질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활동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 뭔지 아무도 모릅니다. 스파오의 컨셉이 뭐냐고 물으면, 스파오 내부 직원조차 한 문장으로 답하기 어려울 거예요.
가성비라는 단어가 만든 착시
"가성비 좋은 SPA 브랜드"— 이 포지셔닝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세요? 가성비는 전략이 아닙니다. 가성비는 소비자가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전까지만 유효한 임시 방편이에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영기 문(Youngme Moon) 교수는 저서 『디퍼런트(Different)』에서 흥미로운 분석을 합니다[2]. "경쟁 브랜드들이 서로를 의식하며 기능을 추가하다 보면, 결국 모두가 비슷해지는 '경쟁적 군집(competitive herding)' 현상이 생긴다"는 거예요. 문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게 비슷해진 브랜드들 사이에서 소비자가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가격이 됩니다. 결국 가장 싼 브랜드만 살아남는 소모전이 시작되는 거죠.
스파오가 정확히 이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유니클로보다 싸다"가 스파오의 가장 강력한 구매 이유라면, 이건 칭찬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내일 더 싼 브랜드가 나오면 소비자는 거리낌 없이 떠나거든요. 실제로 다이소가 의류 카테고리를 강화하고, 중국발 초저가 SPA 브랜드들이 한국 시장에 진입하는 지금, "싸다"는 무기가 얼마나 빨리 무력화되는지를 우리는 실시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면, 유니클로는 히트텍 한 장에 1만 원 가까이 받아도 소비자가 기꺼이 삽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건 단순 내복이 아니라 히트텍이니까"라는 브랜드 안의 브랜드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격이 아니라 "가격의 이유"를 팔고 있는 거예요. 스파오에는 이런 서브 브랜드도, 기술적 스토리도,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입에 올리는 키워드도 아직 없습니다.
6천억 다음에 와야 할 것
매출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시기에 오히려 브랜드 컨셉 정립을 미루는 기업이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지금 잘 팔리고 있는데 굳이?"라는 심리가 작동하거든요. 그런데 의학에 비유하면, 이건 통증 없이 진행되는 질환과 같습니다. 숫자가 좋으니 건강하다고 믿지만, 브랜드 체질 자체는 점점 약해지고 있는 거예요.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뒤입니다.
스파오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콜라보를 하나 더 늘리는 것도, 매장을 하나 더 여는 것도 아닙니다. "스파오는 이런 브랜드입니다"라는 한 문장을 완성하는 겁니다. 그 한 문장이 상품 기획의 기준이 되고, 매장 인테리어의 기준이 되고, SNS 포스팅 한 장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먼저, 지금 스파오 매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 10개를 쭉 늘어놓고 "이 상품들을 관통하는 한 문장"을 써보세요. 그게 안 써지면 브랜드 컨셉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건 비단 스파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매출이 잘 나오고 있는 모든 브랜드가 한 번은 해봐야 하는 점검이에요.
그다음, 경쟁사 분석을 "가격표 비교"에서 "컨셉 비교"로 바꿔보시길 권합니다. 유니클로의 강점은 9,900원 히트텍이 아니라 "라이프웨어"라는 세계관입니다. 무인양품의 강점은 저렴한 가격이 아니라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철학이에요. 여러분의 브랜드는 가격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나요? 그 답이 브랜드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마지막으로, "팬이 생기는 구조"를 설계해야 합니다. 스파오의 콜라보 티셔츠를 사는 사람은 스파오의 팬이 아니라 짱구의 팬이고 산리오의 팬입니다. 콜라보가 끝나면 그 고객은 사라져요. 빌린 트래픽이 아니라 자기 트래픽을 만들어야 합니다. 유니클로의 히트텍처럼 "이건 여기서만 살 수 있다"는 자체 키워드가 필요합니다.
WK의 한 마디
[1] Kevin Lane Keller, Strategic Brand Management, 4th Edition — 고객 기반 브랜드 자산(CBBE) 피라미드 모델
[2] Youngme Moon, Different: Escaping the Competitive Herd, Crown Business, 2010 — 경쟁적 군집화와 브랜드 차별화 전략